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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기 위해서는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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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물은 금세 말라비틀어졌다. 그 사이로 나가니 참혹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더 이상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다. 괴물들은 또 다른 사냥감을 노리러 간 듯 했다. 식물 속에서 꽤 오래 있었는지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그 참혹한 현장 사이에서 피묻은 초코바와 약통을 챙겼다. 그들을 애도할 시간은 없었거니와 내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이 상황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지품은 초코바와 지도, 제대로 터지지도 않는 핸드폰. 나는 홀로 펜션을 나왔다. 동생이 있는 학교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적어도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비상상황이 된 직후 동생에게 연락했을 땐 분명 무사했고, 학교에서 단체로 지내고 있다 했으니 동생은 아직까지 살아있을 것이다. 그런 작은 희망을 가지고 나는 펜션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암담한 상황을 놀리듯 하늘은 맑았다. 마을과 동떨어진 펜션에서 나온 난, 일단 마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파괴된 도로가 보였다. 괴물들이 활보한 지 얼마 안 돼서 죽은 것 같은 시체들이 도로 중간중간에 놓여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천천히 지나쳤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해줄 시간은 없지만, 구태여 품을 뒤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내가 죽은 자에게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친절이었다.

 

  삭막한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피어나던 들꽃들은 이런 사태 속에서도 여전히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회색 벽돌 사이로 삐죽 돋아난 들꽃에 손을 대었다. 들꽃은 내 손길을 받자 곧장 커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집 한 채 만큼의 크기가 되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이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있었다. 마치 숨 쉬는 법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거대해진 들꽃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시들어버린다. 억지로 키워진 크기는 꽃의 생명력까지 태워버린 것이다. 나는 꽃봉우리가 바닥에 떨어져 꽃잎이 꽃씨와 함께 산화하는 걸 보며 다시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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