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갈등의 기로에 서있었다
사람들을 살리는 길과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내 앞에 이지선다처럼 놓여있었다. 나는 커다란 대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았으면 했다. 그럼에도 망설임이 들었던 건 그 시도는 분명 나를 망칠 게 분명했으므로. 내가 짊어진 수많은 목숨의 무게가 오늘따라 무거웠다.
처음으로 우리가 살던 현실이 뒤바뀌던 날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그 날을 재앙의 날이라고 했다. 사람들을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태워버린 건 언젠가는 터지지 않을까 했던 세계대전도, 역병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생각난 블랙홀처럼 생긴 공간과 그 공간에서 무수히 쏟아져나온 괴물들이 압도적인 힘으로 사람들을 학살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현상을 사람들은 ‘게이트가 열렸다’고 명명했다. 총화기도, 일반적인 도검도 통하지 않은 상대에게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재앙의 날에 초능력을 갖게 된 사람들이 있어서였다. 그들은 각성자 혹은 헌터라고 불리며 괴물들과 싸워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신의 축복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생존본능이 이끌어낸 진화라고 했다.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건 없었으나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그 현상이 일어난 계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생존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창 밖으로부터 열기가 느껴졌다. 나의 능력은 작은 생명을 크게 틔우는 것. 땅이 있다면 어디서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내 작은 생명들은 열기를 막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건물을 둘러싼 식물들의 메말라가는 게 내 뺨에 닿는 열기로 느껴졌다. 이젠 정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이 현상에서 나 혼자만 도망친다면 충분히 화마에 먹히지 않을 수 있었다. 세계연합에서 세운 방공호 ‘노아 5호’에는 서울의 생존자가 대피한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이 곳에 최상위 각성자는 나뿐이었다. 하필이면 다른 헌터들이 죄다 출장을 갔을 때 터진 게이트라서. 나는 열기에 바스라지는 식물들 위로 새로운 생명을 끊임없이 덧씌웠다. 이것은 먹고 먹히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관계. 약 한 달을 지속해온 이 관계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불길보다 내 능력이 먼저 닳아버린다면 이 방공호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버릴테지만 내 생명을 담보로 크기를 키운다면 저 불길도 잡아먹을 수 있겠지. 내 정신이 조금이라도 온전할 때 결정해야했다. 이대로는 모두 개죽음을 당할 뿐이니.
나를 지탱하고 있던 식물들이 흩뿌린 씨앗들을 손에 한 움큼 쥐었다. 열에 강한 선인장 종류들의 씨앗은 거의 소모했다. 이제 남은 건…….
내 정신이 흐트러지자, 식물이 막고 있던 구역 중 한 곳이 뚫렸다. 건물 안까지 들어오는 열기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타박하는 그들을 바라본다. 너무나도 약하고 여린 생명들.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저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나는 어쩌다가 끊어내지 못할 사랑을 시작해버린 것인지. 사람들의 외침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변의 기척이 지워지고 온전히 나 혼자 남은 세계. 나는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